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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산고읍성은 지산군의 옛 진산인 영산의 산줄기에 걸쳐 축조되었다. 고려시대에 지산 지역은 영산현이라고 불렸는데, 이름에서 알 수 있듯 고려시대와 그 이전에는 고읍성지 일대가 지산의 중심지였다고 생각된다. 당시의 성곽은 토성으로 추정된다. 조선 전기에 접어들면서 성곽은 석성으로 보수되었으며, 옹성, 치성 등의 방어시설이 이 시기에 갖추어졌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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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 폐성령이 내려졌으나 지산고읍성은 이미 기능을 상실하였고 규모도 협소하여 크게 훼손되지 않은 채 방치되었다. 현대에 들어서는 특별히 보존을 위한 노력을 하지는 않았지만, 2020년부터 [[지산시(플레이시티 블록)|지산시청]] 차원에서 성곽을 보수하고 주변을 정비하는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 |||
== 상세 == | == 상세 == |
2021년 1월 23일 (토) 22:47 판
지산고읍성 芝山古邑城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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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도 기념물 제4호 | |
[[파일:|300px]] | |
정보 | |
분류 | 성곽 |
수량/면적 | |
지정연도 | 2020년 8월 26일 |
시대 | 조선 |
소유 | 지산시 |
관리 | 지산시 |
위치 | |
주소 | 남해 지산시 행궁동 |
소개
지산고읍성은 지산시의 성곽이다.
조선 전기 지산군의 행정 중심으로, 성곽시설이 온전하고 내부의 관아가 일부 남아있어 조선시대 읍성의 원형을 잘 보여준다는 점에서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남해도 기념물 제4호로 지정되었다.
역사
지산고읍성은 지산군의 옛 진산인 영산의 산줄기에 걸쳐 축조되었다. 고려시대에 지산 지역은 영산현이라고 불렸는데, 이름에서 알 수 있듯 고려시대와 그 이전에는 고읍성지 일대가 지산의 중심지였다고 생각된다. 당시의 성곽은 토성으로 추정된다. 조선 전기에 접어들면서 성곽은 석성으로 보수되었으며, 옹성, 치성 등의 방어시설이 이 시기에 갖추어졌다.
임진왜란 이후, 지방 성곽을 보수하는 과정에서 남해도에 여러 성곽이 축조되었다. 지산고읍성은 내부가 협소하여 성곽을 확장할 필요가 있었으나, 지산행궁과 이를 둘러싸는 새 읍성을 축조하기로 하면서 버려지게 된다. 1690년 읍치가 새로운 지산읍성으로 이전되면서 고읍성은 이후 군사 훈련 용도로 사용되게 된다. 1706년에는 고읍성 내로 장관청(將官廳)이 옮겨오게 되며, 활쏘기를 위한 사정(射亭)을 건립하거나 능행 때 훈련을 했다는 기록들이 남아있다.
일제시대 폐성령이 내려졌으나 지산고읍성은 이미 기능을 상실하였고 규모도 협소하여 크게 훼손되지 않은 채 방치되었다. 현대에 들어서는 특별히 보존을 위한 노력을 하지는 않았지만, 2020년부터 지산시청 차원에서 성곽을 보수하고 주변을 정비하는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상세
지산읍성은 진산(鎭山)인 인왕산과 옛 진산인 영산의 산줄기를 따라 평야를 감싸는 평산성 형태로 축조되었으며, 동서남북 4문과 몇개의 보조문을 두었다. 성곽의 북쪽 절반은 구릉을 지나기 때문에 동서남 세 문은 남쪽에 몰려있으며, 북문은 지대가 낮은 서쪽보다 지산의 중심 포구인 후포와 가까운 산 중간의 고개에 자리잡고 있다.
성문
동문: 숭인문
개성나성의 동문에서 이름을 따왔드며, 경주읍성의 향일문을 모티브로 건설되었다. 구조는 단층 문루의 홍예문, 방형의 옹성.
지산읍성의 동문, 숭인문은 청라에서 내려온 객들이 읍성으로 들어올 때 만나는 첫 문이자 동쪽 월성과 북쪽 강경으로 이어지는 길이 출발하는 곳으로 예로부터 지산에서 가장 유동인구가 많았던 곳이다. 지산에서 가장 번성하던 동문시장은 파란만장한 근현대사를 거쳐 남해도 제일의 의류시장이 되었지만 지역경제 활성화와 관광 진흥 차원에서 오일장을 지역특산품과 먹거리 장터로 꾸며 정기적으로 열고 있다.
흥미로운 사실이 하나 있다면, 왕이 지산행궁을 행차할 때는 문루가 단층인 숭인문 대신 이층인 흥례문을 지나 들어왔다고 한다. 문에도 격이 있다고 봤던게 아닐까.
남문: 흥례문
한양도성 흥인지문을 모티브로 하였으며, 이층 문루의 홍예문 형식과 반원형의 옹성 구조를 띄고 있다.
서문: 선의문
개성나성의 서문에서 명칭을 따왔으며, 단층 문루의 홍예문 형식을 띄고 있다.
북문: 자안문
개성나성의 북문에서 명칭을 따왔으며, 단층 문루의 평거식 성문 구조를 띄고 있다.
지산행궁
국왕이 남구릉, 남삼릉에 행차할 때 머물던 행궁으로 평소에는 지산부의 관아로 사용되었다. 현실의 화성행궁을 재현하였다.
이아(貳衙)
행궁 동북쪽에 위치한 관청으로, 읍격이 높아진데다 관아가 행궁을 겸하면서 행정 실무만을 담당할 곳이 필요하게 되어 건설되었다.
종각
남북으로 뻗는 종로(鐘路)와 동서로 뻗는 숙종로(肅宗路)가 교차하는 지점에 자리하고 있다. 본래의 종각은 일제시대에 헐렸으며, 현재의 것은 2020년 전통 양식으로 복원한 것이다.
관광
- 공방마을: 행궁 남쪽에 자리잡은 곳
- 지산행궁박물관: 행궁의 역사와 발굴된 유물을 전시하는 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