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

지산읍성지산시의 성곽이다.

조선시대 지산부의 행정 중심으로, 행궁과 관아, 성곽 시설들이 남아있어 조선시대 읍성의 원형을 잘 보여준다는 점에서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남해도 기념물 제4호로 지정되었다.

역사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 초까지 지산 읍치는 법주사 인근에 자리했다. 현재 지산고읍성(芝山古邑城)으로 알려진 이곳은 문 2개의 작은 성으로 내부에는 필수적인 관청만 존재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본래는 토성으로 축조되었으나 조선 초기에 석성으로 보수된 것으로 추정된다.

임진왜란 이후, 지방의 성곽을 보수할 필요가 제기되면서 강경읍성 등 남해도에 여러 성곽이 축조되게 된다. 지산고읍성의 경우 읍격에 비해 읍성이 너무 협소하여 성을 확장할 필요가 있었는데, 마침 남삼릉과 남구릉 능행을 위해서 행궁을 짓기로 결정하면서 읍치를 옮기고 그곳에 행궁과 이를 둘러싸는 읍성을 새로 축조하는 방안이 제안되었다. 새로운 부지로는 인왕천과 속리천이 자연 해자의 역할을 하고 인왕산과 영산의 줄기가 감싸는 현재의 위치가 결정되어, 1690년부터 행궁과 읍성 공사를 진행하였다. 1793년, 지산행궁을 크게 개축하였고, 지산군을 지산부로 승격하면서 관아의 실무를 분담할 이아(貳衙)를 행궁 동북쪽에 건설한다.

이후, 성곽과 행궁은 대한제국기까지 보존되어 왔으나, 일제시대에 폐성령과 함께 평지의 성곽이 헐리고 행궁과 관아 역시 학교나 관청으로 사용되며 훼손되는 등의 수난을 겪게 된다. 현대에 들어서는 보존을 위한 노력이 부족하였으나, 2020년부터 지산시에서는 성곽과 행궁을 복원하고 주변을 정비하는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상세

지산읍성은 진산(鎭山)인 인왕산과 옛 진산인 영산의 산줄기를 따라 평야를 감싸는 평산성 형태로 축조되었으며, 동서남북 4문과 몇개의 보조문을 두었다. 성곽의 북쪽 절반은 구릉을 지나기 때문에 동서남 세 문은 남쪽에 몰려있으며, 북문은 지대가 낮은 서쪽보다 지산의 중심 포구인 후포와 가까운 산 중간의 고개에 자리잡고 있다.

성문

동문: 숭인문

개성나성의 동문에서 이름을 따왔드며, 경주읍성의 향일문을 모티브로 건설되었다. 구조는 단층 문루의 홍예문, 방형의 옹성.

지산읍성의 동문, 숭인문은 청라에서 내려온 객들이 읍성으로 들어올 때 만나는 첫 문이자 동쪽 월성과 북쪽 강경으로 이어지는 길이 출발하는 곳으로 예로부터 지산에서 가장 유동인구가 많았던 곳이다. 지산에서 가장 번성하던 동문시장은 파란만장한 근현대사를 거쳐 남해도 제일의 의류시장이 되었지만 지역경제 활성화와 관광 진흥 차원에서 오일장을 지역특산품과 먹거리 장터로 꾸며 정기적으로 열고 있다.

흥미로운 사실이 하나 있다면, 왕이 지산행궁을 행차할 때는 문루가 단층인 숭인문 대신 이층인 흥례문을 지나 들어왔다고 한다. 문에도 격이 있다고 봤던게 아닐까.

남문: 흥례문

한양도성 흥인지문을 모티브로 하였으며, 이층 문루의 홍예문 형식과 반원형의 옹성 구조를 띄고 있다.

서문: 선의문

개성나성의 서문에서 명칭을 따왔으며, 단층 문루의 홍예문 형식을 띄고 있다.

북문: 자안문

개성나성의 북문에서 명칭을 따왔으며, 단층 문루의 평거식 성문 구조를 띄고 있다.

지산행궁

국왕이 남구릉, 남삼릉에 행차할 때 머물던 행궁으로 평소에는 지산부의 관아로 사용되었다. 현실의 화성행궁을 재현하였다.

이아(貳衙)

행궁 동북쪽에 위치한 관청으로, 읍격이 높아진데다 관아가 행궁을 겸하면서 행정 실무만을 담당할 곳이 필요하게 되어 건설되었다.

종각

남북으로 뻗는 종로(鐘路)와 동서로 뻗는 숙종로(肅宗路)가 교차하는 지점에 자리하고 있다. 본래의 종각은 일제시대에 헐렸으며, 현재의 것은 2020년 전통 양식으로 복원한 것이다.

관광

  • 공방마을: 행궁 남쪽에 자리잡은 곳
  • 지산행궁박물관: 행궁의 역사와 발굴된 유물을 전시하는 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