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편집 권한이 없습니다. 다음 이유를 확인해주세요: 요청한 명령은 다음 권한을 가진 사용자에게 제한됩니다: 사용자. 문서의 원본을 보거나 복사할 수 있습니다. == '''소개''' == 조선시대 지산군의 행정 중심으로, 15세기 조선 초에는 진성 규모의 작은 성에 불과했으나 임란 이후인 17세기 초에 방비를 위해서 성을 크게 개축하게 된다. 일제의 폐성령 이후로 성곽이 훼손되고 행궁과 관아는 헐리거나 학교 등으로 용도가 전용되었지만 복원을 위한 노력 덕에 현재는 영화로웠던 옛 정취를 많이 회복한 상태이다. 지산읍성은 진산인 보문산 능선을 따라 평야를 감싸는 평산성 형태로 축조되었으며, 동서남북 4문과 암문 하나를 두었다. 특이하게도 고읍성 남북으로 성곽을 연결하여 지어졌는데, 성 내에 자리잡게 된 고읍성 서쪽 성곽은 여장이 없지만 동쪽 성곽은 여장이 개축된 흔적이 보인다. == '''동문: 숭인문''' == 개성나성의 동문이라 불리며, 경주읍성의 향일문을 모티브로 건설되었다. 구조는 단층 문루의 홍예문, 방형의 옹성. 지산읍성의 동문, 숭인문은 청라에서 내려온 객들이 읍성으로 들어올 때 만나는 첫 문이자 동쪽 월성과 북쪽 강경으로 이어지는 길이 출발하는 곳으로 예로부터 지산에서 가장 유동인구가 많았던 곳이다. 지산에서 가장 번성하던 동문시장은 파란만장한 근현대사를 거쳐 남해도 제일의 의류시장이 되었지만 지역경제 활성화와 관광 진흥 차원에서 오일장을 지역특산품과 먹거리 장터로 꾸며 정기적으로 열고 있다. 흥미로운 사실이 하나 있다면, 왕이 지산행궁을 행차할 때는 문루가 단층인 숭인문 대신 이층인 흥례문을 지나 들어왔다고 한다. 문에도 격이 있다고 봤던게 아닐까. 이 문서에서 사용한 틀: 틀:블록정보/문화재 (원본 보기) (보호됨)지산고읍성 문서로 돌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