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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문단 | 과거제의 문제점과 교육의 불평등화===
===2문단 | 과거제의 문제점과 교육의 불평등화===
과거제 역시 오랜 기간 동안 담습된 것을 지원자의 인격에 대한 온전한 검증 없이 시험 답안만으로 지원자의 역량을 평가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능력주의작, 결과주의적 인재 선발 방식인 과거제는 국가의 관료 선발 방식으로는 적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선비들이 인격 수양에 힘쓰기보다 합격에만 골몰하게 하여 학문 풍토에도 악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실제로 누대에 걸쳐 축적된 과거 시험 모범 답안집이 유행하기도 하였으며, 경서의 내용을 기억하기 쉽게 한 글자씩 뽑아 외우는 수험 방법이 발달하였기 때문에 학문적 자질이 충분하지 못하더라도 과거 응시에 필요한 지식을 빠르게 습득할 수 있었다. 또 과거 시험의 합격자 중 절반 이상이 서울 출신이었으며 그 나머지 역시 지방의 주요 도시와 그 인근에 편중되었다. 이는 교육자원과 최신 학문의 지역 격차가 심화되어 교육의 불평등화가 심화되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과거제 역시 오랜 기간 동안 담습<ref>예로부터 해 오던 방식이나 수법을 좇아 그대로 행하다.</ref>된 것을 지원자의 인격에 대한 온전한 검증 없이 시험 답안만으로 지원자의 역량을 평가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능력주의작, 결과주의적 인재 선발 방식인 과거제는 국가의 관료 선발 방식으로는 적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선비들이 인격 수양에 힘쓰기보다 합격에만 골몰하게 하여 학문 풍토에도 악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실제로 누대에 걸쳐 축적된 과거 시험 모범 답안집이 유행하기도 하였으며, 경서의 내용을 기억하기 쉽게 한 글자씩 뽑아 외우는 수험 방법이 발달하였기 때문에 학문적 자질이 충분하지 못하더라도 과거 응시에 필요한 지식을 빠르게 습득할 수 있었다. 또 과거 시험의 합격자 중 절반 이상이 서울 출신이었으며 그 나머지 역시 지방의 주요 도시와 그 인근에 편중되었다. 이는 교육자원과 최신 학문의 지역 격차가 심화되어 교육의 불평등화가 심화되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3문단 | 유형원이 제시한 공거제===
===3문단 | 유형원이 제시한 공거제===

2021년 8월 23일 (월) 01:53 판

틀테스트

1문단 | 성장하는 사학, 관학을 쇠퇴시키다.

조선 왕조는 관학(官學)과 과거제를 인재 양성과 관료 수급의 근간으로 삼아 국가를 운영하였다. 조선 왕조는 국가 운영에 필요한 관료를 양성하기 위해 서울에서는 성균관을, 지방에서는 향교를 각각 설치하여 운영하였다. 그러나 16세기에 접어들면서 성균관을 거치지 않고도 어린 나이에 관직에 나가는 경우가 많아져 성균관에 정원은 크게 미달하였으며, 향교에서는 양반의 자제들이 평민들과 섞여 공부하기를 꺼리는 경향이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관학에 대한 정부의 재정적 지원마저 소홀해져 지방에서는 서원으로 대표되는 사학(私學)이 융성하기 시작하였다. 관학이 침체되어 감에 따라 관학으로부터 인재 영입이 어려워진 조정은 사학에서 육성한 인재를 관료로 발탁하였고, 이는 사학을 더욱 활성화하고 관학을 더욱 쇠퇴하게 하였다.

2문단 | 과거제의 문제점과 교육의 불평등화

과거제 역시 오랜 기간 동안 담습[1]된 것을 지원자의 인격에 대한 온전한 검증 없이 시험 답안만으로 지원자의 역량을 평가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능력주의작, 결과주의적 인재 선발 방식인 과거제는 국가의 관료 선발 방식으로는 적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선비들이 인격 수양에 힘쓰기보다 합격에만 골몰하게 하여 학문 풍토에도 악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실제로 누대에 걸쳐 축적된 과거 시험 모범 답안집이 유행하기도 하였으며, 경서의 내용을 기억하기 쉽게 한 글자씩 뽑아 외우는 수험 방법이 발달하였기 때문에 학문적 자질이 충분하지 못하더라도 과거 응시에 필요한 지식을 빠르게 습득할 수 있었다. 또 과거 시험의 합격자 중 절반 이상이 서울 출신이었으며 그 나머지 역시 지방의 주요 도시와 그 인근에 편중되었다. 이는 교육자원과 최신 학문의 지역 격차가 심화되어 교육의 불평등화가 심화되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3문단 | 유형원이 제시한 공거제

반계 유형원은 관학의 침체와 과거제의 폐단으로 교육과 관료 수급에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며 이에 대한 대안으로 학제 개편을 통한 ㉠공거제를 제시하였다. 그는 교육을 단순히 지식의 전달이나. 문자적 학습의 그치는 것으로 이해한 것이 아니라 도덕적 인격을 바탕으로 가정, 사회, 국가에 성리학의 이념과 규범이 관철되도록 하는 사회ㆍ정치적 의미를 가진 것으로 이해했다. 그가 제안한 공거제는 양반과 평민을 대상으로 각 고을에서 자율적으로 설립ㆍ운영되는 이숙(里塾)을 거쳐 서울에서는 방상(坊庠)에서 15세까지 공부를 하고 사학(四學)에서 3년, 중학(中學)에서 다시 1년을, 지방에서는 향상(鄕庠)에서 15세까지 공부를 하고 읍학(邑學)에서 3년, 영학(營學)에서 다시 1년을 수학[2]한 뒤 최고의 교육기관인 태학(太學)에 입학하는 학제를 기본으로 한다. 그리고 태학의 제학생 중 일부가 진사로 선발되어 진사원(進士院)에 들어가고 이들은 인품과 실무 능력에 대한 검증을 거친 후 7-9품직에 임명될 수 있다. 공거제에서 상급 학교로 진학하기 위해서는 엄격한 선발을 거쳐야 하는데 이를 담당하는 수령이나 교관이 부적절한 인재를 선발할 경우 파직이나 징계를 당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와 같이 일정한 체계를 갖춘 관학을 활성화하여 인재를 양성하고 이 가운데서 여러 단계를 거쳐 관료를 선발하면 교육의 지역 격차를 없앰과 동시에 특정 지역의 세력이 득세하는 것도 막을 수 있으며 궁극적으로 전국 각지가 교화되어 이상 국가를 건설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4문단 | 재정적 뒷받침

유형원은 이러한 학제 개편을 실행하기 위해서 재정적 뒷받침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하였다. 교육을 통해 도덕과 지식이 적절히 조화된 우수한 인재가 길러지기 위해서는 온전히 학문에 정진할 수 있도록 안정적인 생활 기반이 마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유형원은 중국의 토지 제도뿐만 아니라 고려의 토지 제도에 대해서도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조선의 모든 법제와 사회 조직의 근간이 토지 제도라는 점을 간파하여 토지 개혁안으로 균전제를 주장하였다. 균전제는 개인이 사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토지를 국유화하여 사회 구성원들에게 골고루 재분배하고 관리하자는 것이다. 토지의 국유화는 왕명을 통해 실현할 수 있으며, 나누어 준 토지라도 사회 구성원이 죽으면 해당 토지는 다시 국유화되어 관리가 가능하다. 그런데 유형원이 생각한 '골고루 재분배' 한다는 것은 사(士)[3], 농(農)[4], 상(商)[5] 간에 균등한 면적의 토지를 분배하자는 것이 아니라 노동력, 신분, 사회 분업 관계 등을 고려하여 선비를 우대하고 선비에게 더 많은 토지를 분배한다는 것이다. 균전제를 통한 토지 개혁에는 사적 소유에 바탕을 둔 조선의 제도와 문화를 공적 소유의 개념으로 바꾸어야 이상적인 국가 운영이 가능하다는 생각이 반영되어 있었다.

5문단 | 유형원의 개혁안의 한계와 의의

유형원의 개혁안은 그의 사후 여러 유학자들에 의해 조선 왕조에 건의되었지만 당시 사회 질서에 위배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기득권 세력들의 반대에 막혀 실현되지 못하였다. 하지만 당시 조선이 처해 있던 현실을 분석하고 이를 정치 제도에 반영하려 한 시도는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평가되어 조선 후기 지식인들과 개화기 국가 개혁론자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A

  1. 예로부터 해 오던 방식이나 수법을 좇아 그대로 행하다.
  2. 학문을 닦음.
  3. 선비 사
  4. 농사 농
  5. 헤아릴 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