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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2월 25일 (목) 04:16 판
지산 강경읍성 芝山 江景邑城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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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도 기념물 제5호 | |
[[파일:|300px]] | |
정보 | |
분류 | 성곽 |
수량/면적 | |
지정연도 | 2020년 8월 26일 |
시대 | 조선 |
소유 | 지산시 |
관리 | 지산시 |
위치 | |
주소 | 남해 지산시 강경읍 |
개요
강경읍성은 지산시의 성곽이다. 강경읍 읍내리에 위치한다. 해안 방위를 위하여 산과 바다를 끼고 축조된 성으로, 강경도호부의 행정중심이기도 하였다. 남도수군통제사가 지휘하던 통제영이 성 내에 위치한다.
역사
강경 지역은 예로부터 해상에서 남해평야로 들어오는 관문항 역할을 했던 곳이다. 삼국시대와 고려시대만 해도 현 대저리 지역은 바다였던 것으로 생각되며, 강경현의 읍치는 현재의 문수리와 대저리에 걸쳐 자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읍내리, 성동리 등 현재의 강경 읍내는 대형 사찰인 회암사 소속 토지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15세기 초에 남강 하구가 퇴적으로 막히면서 옛 읍치가 항구로 기능할 수 없게 되면서 현재의 읍내로 읍치를 옮기게 된다.
강경읍성의 축조시기는 문헌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15세기 초에 읍치를 옮기면서 같이 축조된 것으로 추정한다. 강경읍성은 초기에는 방어 목적보다는 행정 목적에 가까웠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거치며 남해우수영이 자리하게 되고 성곽도 방어 목적으로 개축하였다.
일제시대에 강경읍성도 훼철당하였으나, 반 이상 산에 걸쳐 있던 구조 덕에 많은 부분이 원형대로 남을 수 있었다. 진서문, 숭남문, 성동문이 헐리고, 경북문만이 살아남았다.
2019년부터 지산시청은 강경읍성을 정비하고 복원하기 위해서 성벽 인근 부지를 매입해왔고, 발굴조사와 연구 끝에 2020년부터 강경읍성과 통제영 유적의 복원을 시작하기로 했다.
상세
경북문
경북문의 이름은 북쪽을 공경하는 문이라는 뜻으로, 수도 방향의 문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인근에 왕실 사찰인 회암사가 있다. 일제시대를 거치며 많은 읍성들이 훼철되었는데 경북문은 평지에 위치한 문임에도 훼철되지 않았다.
성동문
이층 누각의 홍예문 또는 평거식 성문으로, 성동문은 동쪽을 살피는 문이라는 뜻이다. 원래 성동문()이었으나 18세기에 바뀐 것으로 추정되며, 그 이유는 알 수 없다. 동문 앞에는 지산에서 가장 오래된 재래시장인 강경시장이 위치한다.
숭남문
숭남문은 남쪽을 높이는 문이라는 뜻이다. 9개의 왕릉이 모인 남구릉으로 향하는 문이기에 명명되었다.
진서문
이층 누각의 홍예문 형태와 방형 옹성 구조를 띄고 있는 진서문은 서쪽을 진압하는 문이라는 뜻인데, 이는 강경읍성에서 유일하게 바다를 마주하는 문인 것과도 관련이 있다.
통제영
통제영은 통제사가 수군을 지휘하던 곳이다. 통제사는 임란 중에 수군을 통솔할 지휘관이 필요하여 신설되었으며 조선 중후기를 거치며 2년 임기로 상설화된다. 통제사는 남해우수사(남해우도수군절도사)가 겸임하였으며, 통제영도 남해우수영을 겸하였다. 일제시대에 세병관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건물이 훼철되었으나 현대에 들어 다시 복원되고 있다.
암문
강경읍성의 암문은 서북암문과 동북암문 두 곳이 있다. 서북암문은 해안을 따라서 미륵산성에 접근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동북암문은 북쪽 산을 통해 물자나 군사를 보급받기 위한 문으로 보인다.